골방잡담
길상사와 법정스님 이야기 : 무소유를 실천한 사람들 본문
어렸을 적, 성북동 골짜기에는 거대한 저택이 있었다. 그곳은 정치인 등 당시 유력자들이 드나드는 '대원각'이라는 고급 요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직장에서 해외 바이어들을 위한 접대 장소로 그곳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 후 해외에 있을 때 '무소유의 삶'을 펴던 한 스님이 그 자리에 길상사를 절을 세웠다는 기사를 읽었던 것 같다. 그리고 요정 주인이 기부했다는 이야기까지... 귀국 후 어느 날, 서울에 아름다운 사찰이 있는 데, 특히 분위기가 너무 좋아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 보기로 했었다.
다녀온 지 세월이 흘렀지만, 법정 스님과 길상사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를 때마다 가음이 뭉클해진다.
한국의 불행했던 근대사인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이루지 못한 사랑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여인, 그리고 창씨개명과 전향을 거부하여 만주로 떠났다 해방 후 북에 정착한 시인,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던 스님, 이 세 사람이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직간접적으로 얽히면서 무소유를 실천을 통해 길상사를 태어나게 한 것이 아닐까...
언제나 계절이 바뀌면, 못다 이루었기에 더욱 애틋한 사랑이 길상사의 꽃으로 피어나 사람들에게 더욱 다가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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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각
1970~80년대 군사정권 시절 '요정정치'라고 불리면서 고위급 인사들과 재벌들의 비밀 회동 장소로 자주 이용되었다고 한다. 드라마와 영화들에서 으리으리한 기와집에 가야금 소리가 들리고 기생이 나오는 술집이 나오는데, 일제 강점기도 아니 현대에 이런 곳이 있을까 했는 데, 이 배경이 대원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주인인 김영한(1916 ~1999)은 엄청난 부를 이뤘다.
길상사 내에 있는 그녀의 사당 앞에 있는 안내판에 의하면 1955년 바위 사이 골짜기 맑은 물이 흐르는 성북동 배밭골을 사들여 대원각이란 한식당을 만든 것으로 되어 있다.
백석과 자야
그녀는 쇠락한 양반가의 딸로 16살 때 진향(眞香)이라는 이름을 받아 기생이 됐다. 1938년 시인 백석(1912 ~1996)과 서울 청진동에서 동거를 시작했지만, 백석 부모의 반대로 28일 만에 헤어져야 했다. 백석은 그녀에게 자야(子夜)라는 이름을 지어 줬다.
백석의 시(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1938년 발표) 속에 나오는 나타샤는 바로 자야, 김영한이라고 한다. 이 시는 현실을 초월한 이상, 사랑에 대한 의지, 그리고 소망을 노래한 작품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김영한은 평생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에는 식사를 하지 않았고, 길상사에 기부(시가 천억 원에 달함)한 '그 많은 재산이 아깝지 않으냐'는 물음에 '1,000억은 그 사람의 시 한 줄만 못하다'라고 대답했다고 할 정도로 백석을 그리워했다.
길상사
김영한은 법정 스님(1932 ~2010)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1987년 스님에게 대원각을 시주하겠으니 절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스님은 사양하다가, 8년여의 설득에 1995년 6월 기존 건물을 보수하여 사용할 것을 원칙으로 시주를 받아들였고, 송광사 말사(末寺) 대법사로 등록했다.
이때 스님은 그녀에게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주었고, 1997년에는 절 이름도 길상사로 바꾸었다. 그해 창건 법회에서 그녀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만 ….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길상사 범종각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던 팔각정은 종루(범종각)가 되었고, 밀실정치와 기생관광의 무대였던 대원각의 다른 건물들 역시 극락당, 지장전, 설법전 등으로 바뀌었다. 경내의 크고 작은 건물들도 스님들의 숙소나 불자들의 기도처가 됐다.
이 공사 과정에서 나무 기둥을 아무리 깎아도 배어 있는 고기와 술 냄새가 없어지지 않아 무척 애를 먹었다는 일화도 있다. 불교에서 얘기하는 진흙 속에서 피어난 연꽃처럼, 요정은 사찰이 되고 기생은 보살이 된 것이다.
2017년 가을 길상사의 전경
자야의 시주와 법정 스님의 《무소유》
김영한은 8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녀는 죽기 전에 서울 서초구에 있는 122억 원 상당의 건물을 “과학기술 발전에 써 달라”며 한국 과학기술원(KAIST)에 기부했다.
또한, 자신의 유해를 눈이 오는 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길상사 경내의 길상헌 뒤쪽 언덕에는 김영한의 공덕비가 세워졌다.
법정 스님 수필집의 대표 글인 '무소유'에는 스님이 아끼며 기르던 난초를 다른 사람에게 주게 된 사연을 얘기하고 있는데, 읽다 보면 그 정경이 절로 그려져 미소가 흘러나온다. 스님은 난초를 소중히 기르던 일이 집착과 소유욕을 생겨나게 만들었음을 깨닫고, 그 아끼던 난초를 주어버림으로써 무소유를 향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사연을 밝힌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逆理)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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