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왜 유급 육아휴직이 의무화되지 않았을까?
The US is the only rich nation offering no national paid parental-leave programme. Why is that – and could it change?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지만, 유일하게 전국 단위의 유급 육아휴직 제도를 제공하지 않는 선진국입니다. 2015년 Pew Research Center에 따르면, 미국 가정의 약 절반이 정규직 맞벌이임에도 불구하고, 고용주를 통해 유급 육아휴직을 받을 수 있는 근로자는 전체의 21%에 불과합니다.
이는 유럽 국가들이 보조금을 지급하며 유급 육아휴직을 표준화한 것과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유급 육아휴직은 부모, 자녀, 그리고 이를 제공하는 사회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실제로 2024년 4월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미국인의 82%가 유급 육아휴직 제도 도입에 찬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여전히 미국은 이 제도를 전면적으로 도입하지 못하고 있을까요?
역사적 배경: 1차 대전 이후 유럽과 미국의 갈림길
1919년 국제노동여성회의(ICWW)는 12주간의 유급 출산휴가를 의학적 필수이자 사회적 권리로 선언했고, 국제노동기구(ILO)가 이를 채택하면서 유럽과 라틴아메리카는 점차 이 제도를 법제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상황이 유럽과 달랐습니다.
유럽은 전쟁으로 인한 인구 감소와 경제 재건의 필요성 때문에 육아휴직을 경제적 수단으로 접근했지만, 미국은 전쟁 피해가 적고 이민자 유입으로 노동력이 충분했습니다. 오히려 전쟁에서 돌아온 남성에게 일자리를 돌려주기 위해 여성들이 가정으로 돌아갈 것을 장려했습니다.
이념의 충돌: 복지국가 vs 반공주의
유럽 국가들은 전후 파시즘의 충격을 겪으며 사회적 연대와 복지국가 체제를 통해 민주주의를 보호하려 했습니다. 유급 출산휴가는 공공의료, 교육, 연금제도와 함께 도입되었습니다.
반면 미국은 냉전과 소련과의 긴장 속에서 복지 정책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 사회보장이나 의료지원을 "사회주의적" 또는 "공산주의적" 정책으로 간주해 거부감을 드러냈습니다. 유급 육아휴직 역시 이와 같은 이념적 거부감에 가로막혀왔습니다.
인종과 계층: 누구의 노동을 인정할 것인가?
미국의 유급 육아휴직 미도입에는 인종주의적 요소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보편적 제도를 도입할 경우,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이나 최근 이민자 여성들이 수혜자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정책 도입을 막는 논리로 작용했습니다.
2020년 기준, **저임금 노동자(시간당 $14 미만)**의 유급 육아휴직 접근률은 8%에 불과했지만, 고소득 백인 중심의 화이트칼라 직종은 상대적으로 혜택이 풍부했습니다.
이러한 불균형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여전히 "가난은 개인의 책임이므로 지원할 필요 없다"는 비판적 담론이 존재합니다.
시장에 맡겨진 책임: 기업 중심의 육아휴직
미국은 유급 육아휴직 여부를 개별 기업의 정책에 맡기고 있으며, 이는 혜택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대기업이나 고임금 노동자는 일부 혜택을 누릴 수 있지만,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은 여전히 배제되어 있습니다.
정치권 역시 제도 도입의 필요성은 공감하지만, 재원 마련 방식에서 의견이 갈리며 실질적인 진전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미국인 상당수는 유급 휴가를 찬성하면서도, 정부가 이를 직접 재정으로 운영하는 데에는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의 제안과 주(州) 차원의 변화
조 바이든 대통령은 상위 1% 소득자에 대한 증세를 통해 12주간의 유급 가족 및 병가 휴직을 제공하는 2,250억 달러 규모의 법안을 제안했습니다.
또한 캘리포니아, 뉴욕, 워싱턴 등 9개 주와 워싱턴 DC는 자체적으로 유급 육아휴직 제도를 마련했고, 연방정부 공무원에게도 이미 12주의 유급 육아휴직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일부 주에서는 제도가 성공적으로 안착하고 있고, 기업들도 오히려 이 제도가 직원 이탈을 줄이고 생산성을 높인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팬데믹 이후의 전환점: 가능성은 남아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여성 노동자의 대규모 이탈(300만 명 이상)과 육아·가사 노동의 불균형을 드러냈습니다. 이제 더 많은 국민들이 유급 육아휴직을 경제 성장의 필수 기반이자 정신 건강, 삶의 질 개선과 연결된 제도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지금이야말로 제도를 전국화할 정책의 창(policy window)이 열려 있다고 보지만, 정치적 교착 상태가 여전히 큰 걸림돌입니다.
유급 육아휴직, ‘당연한 권리’로 만들 수 있을까?
미국의 유급 육아휴직 미비는 단순한 행정적 부재가 아닌, 역사·이념·문화·인종이 얽힌 복잡한 구조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주 차원의 실험과 팬데믹이 드러낸 현실은 새로운 제도적 전환의 필요성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파괴에는 재건이 따른다."
지금이야말로 미국이 돌봄과 노동의 균형을 재설계하고, 유급 육아휴직을 모든 사람의 당연한 권리로 만드는 전환점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Why doesn't the US have mandated paid maternity leave?
The US is the only rich nation offering no national paid parental-leave programme. Why is that – and could it ch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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